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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 호국보훈의 달 특별 인터뷰 #기획특집
장훈 명예시민기자 사진나세용 명예시민기자

호국보훈의 달 특별 인터뷰
“대한민국을 지킨 역전의 용사와
독립유공자를 기억합니다”

속초는 6·25전쟁 당시 국군에 의해 되찾은 소중한 땅입니다. 1951년 대한민국 국군의 진격으로 수복된 속초는, 사실 두 차례에 걸쳐 탈환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 번째 수복은 대한민국 국군 제1군단(제3사단과 수도사단으로 구성)의 진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38선 진격이 결의되자 제3사단은 1950년 10월 1일 양양 38선에서 북한 공산군 제5사단의 저항을 제압하고 북한으로 진격했습니다.

‘10월 1일 국군의 날’은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것입니다. 그러나 1950년 11월 중공군이 개입하여 전세는 다시 역전되었고 1950년 12월과 이듬해 1월에 걸쳐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다시 넘어 삼척까지 후퇴해야 했습니다. 이후 전열을 가다듬은 국군과 유엔군은 1951년 3월에 38선을 다시 탈환하였고, 6월에는 양양군 지역을 재수복했습니다. 이 덕에 속초는 오늘날의 평화와 번영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6·25 참전 유공자회 속초시지회 이춘홍 회장

“고1 학도병으로 6·25 참전, 월남전 두 번 다녀와”
이같이 속초가 수복되는 데는 6·25 참전 용사들이 흘린 피와 숭고한 희생이 있었습니다. <속초홀릭>은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6·25 참전 유공자회 속초시지회를 찾아, 참전 용사 이춘홍 회장님의 생생한 증언을 들어봤습니다. 이 회장님은 고등학교 1학년때 자원 입대해 한국전쟁을 몸소 겪었고 월남전에 두 차례 참전한 역전의 용사입니다.

“내가 북한 단천고 1학년 때 남한으로 내려와 미국극동사령부(FECOM) 8240 유격대에 입대했어. 북한군 보위부가 집안의 논과 밭을 빼앗고 아버지를 때리고 영창에 가둬 어린 마음에 복수를 하고 싶었어. 당시 부대가 노학동 한화콘도 근처에 있었지. 물치비행장에서 이북 침투 낙하산 훈련을 받았고 원산 앞바다까지 올라갔던 기억이 나는구먼.” 올해 아흔셋인 이 회장님은 노트북에서 고향 단천의 지도를 보면서 기억을 되살려 당시 얘기를 꺼냈습니다.

“1950년 12월 추운 날이었어. 매형과 누나를 비롯해 마을 사람 12명과 함께 목선에 올라 단천을 떠났지. 바람이 불지 않으면 노를 저어 닷새 만에 가까스로 주문진에 도착했어. 부모님은 할머니가 고령이시라 같이 오지 못했어. 피난 갔다가 1주일이면 고향으로 돌아올 줄만 알았지.” 8240 유격대에서 3년간 복무한 이 회장은 1954년 제대한 뒤 속초에서 오징어 배를 타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고된 삶을 벗어나기 위해 다시 육군 제2훈련소에 사병으로 입대했습니다. “원적이 북한이라 호적을 다시 만들었어. 군에 입대하기 위해 나이를 줄였지. 그래서 내가 1933년생인데 호적에는 39년생으로 되어 있어.”

이 회장님은 HID(육군첩보부대)에서 4년을 복무했으며 삼척 23사단에서 36년간의 군 생활을 이어간 끝에 원사로 제대했습니다. 한국전쟁과 월남전에 두 차례 참전한 그는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돌이켜보면, 내가 참 운이 좋았지.”

속초시지회 최고령 회원은 올해 99세 최남진 회원
“현재 속초시지회 회원은 52명인데 해가 갈수록 회원들의 건강이 안 좋아져. 최고령 회원은 올해 99세인 최남진 회원이야. 지금은 거동이 어려워 행사에 나오지 못하고 있지. 여러 추모 행사에 나오는 회원도 너덧 명에 불과해.” 세월이 흐르면서 1세대 참전 용사들이 세상을 떠나고 있어, 속초시지회는 유족들이 유공자회의 정신을 계승할 수 있도록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2세대들이 타지에 거주하거나 생업에 바빠 적극적인 참여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속초시지회 역전의 용사들은 6월 6일 속초 충혼탑에서 열리는 현충일 추모식, 6월 25일 속초문화회관 행사에 참석할 예정입니다. 특히 올해는 6·25 75주년을 맞이해 더 뜻깊은 자리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속초시지회 사무실 벽에는 이런 문구가 붙어 있습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이 맥아더 장군의 명언처럼, 속초시지회 회원들의 전의와 열정은 여전히 진실하고 강인합니다. 이들이 지켜낸 나라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의 뿌리이자 밑거름이 되고 있습니다.


독립유공자 후손 석봉 조무호 선생님

“1919년 보령 국사봉에 태극기를 꽂고 독립만세 외친 할아버지의 정신이 있었기에”
속초 청초정 앞에 자리한 석봉도자기미술관은 속초의 문화예술을 살찌우는 문화 명소입니다. 석봉 조무호 선생은 1997년 여주에 첫 미술관을 열고, 2001년 속초로 이전하면서 한국 도자기 문화의 맥을 이으며 지역 예술 발전에 크게 기여해왔습니다. 그런데 조무호 선생님이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이번 취재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현재 석봉도자기미술관의 고문으로 후진을 양성하는 조무호 선생님은 독립유공자 박윤화 옹의 후손입니다.

“박윤화 독립유공자가 저의 외할아버지이십니다. 어머니가 무남독녀셨기 때문에 제가 직계외손으로 2013년 국가유공자 증서를 받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충남 보령 출신으로 제가 세 살 때인 1940년에 돌아가셔서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습니다. 전해 듣기로는 1919년 3월 17~18일 밤에 충남 보령 주렴산에 올라가 국사봉 등 세 곳에 태극기를 꽂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징을 치는 등 시위를 벌였다고 합니다. 이 사실이 바로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그해 4월 20일 보안법 위반 혐의로 보령경찰서에서 태형 90도를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고 합니다.” 정부에서는 박윤화 옹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는데 뒤늦게 조무호 선생님이 외손자임이 밝혀져 명예로운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속초에서 이어가는 독립의 뜻, 도예에 깃든 선조의 정신
조무호 선생은 2001년 속초에 터를 잡고 석봉도자기미술관을 설립한 이후 25년간 지역에 뿌리내리며 창작과 교육에 힘써왔습니다. 석봉도자기미술관 2층 설악관을 둘러보니 설악산 장군봉과 천불동계곡을 한눈에 볼 수 있게 정밀하게 묘사한 도자기 벽화가 장관이었습니다. 또한 털 하나까지 자세히 묘사된 백두산 호랑이를 그린 ‘호도대명’과 백로의 흰 깃털의 가벼운 질감을 잘 표현한 ‘백로대명’은 압도적인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분들이 미술관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는 데 도움을 주셨습니다. 다만 미술관이 500평 규모로 크다 보니 운영에 필요한 관리비, 인건비 등이 만만치 않아 여러 운영 방안을 고민 중입니다. 이전에는 웬만하면 제가 직접 관람객들에게 도자기 예술에 대한 설명도 자주 했지만, 이제는 나이 탓에 체력적으로 쉽지 않네요. 그래도 속초에서 건강하게 살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속초에 정착한 이후에도 그는 꾸준히 지역 문화 발전에 힘썼으며, 강원도 도자기 명장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건강상의 이유로 작품 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광복회 활동을 이어가며 독립운동 선열의 뜻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만은 변함이 없습니다.

도자 예술에 평생을 바친 선생의 불굴의 열정과 용기는, 어쩌면 1919년 보령 국사봉에 태극기를 꽂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외조부 박윤화 선생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속초의 값진 문화유산인 석봉도자기미술관이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공간으로 이어지길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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